네이처 논문: 전신마취 무의식 상태에서도 인간 뇌는 LLM처럼 다음 단어를 예측한다
베일러 의대 연구진은 전신마취로 무의식 상태인 환자의 해마 신경원이 실시간으로 언어를 분석하고 다음에 올 단어를 예측한다는 연구 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했다. 대형언어모델(LLM)과 유사한 예측 부호화가 의식 없이도 작동함을 입증한 연구로, 향후 뇌 손상 환자를 위한 음성 보철 기기 개발에 기여할 전망이다.
수술실에서 전신마취제를 맞고 완전히 의식을 잃은 환자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 뇌는 그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신경과학계의 상식적인 답은 '불가능하다'였다. 마취는 의식의 전원을 끄는 일이며, 언어 이해 같은 고차원 인지 기능도 당연히 멈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5월 6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베일러 의대 연구진의 논문은 이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전신마취 상태에 놓인 환자의 뇌, 특히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실시간으로 언어를 분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형언어모델(LLM)처럼 다음에 이어질 단어까지 예측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마에 꽂힌 뉴로픽셀 프로브
이번 발견은 뇌전증 수술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연구를 이끈 베일러 의대 신경외과 사미르 셰스(Sameer Sheth) 교수 연구팀은 해마 접근이 불가피한 수술 과정을 활용해, 기존에 이 부위에 쓰인 적 없던 초정밀 신경 기록 장치인 '뉴로픽셀(Neuropixels) 프로브'를 최초로 투입했다.
이를 통해 전신마취로 무의식 상태가 된 환자의 해마 속 단일 신경원 수백 개의 활동을 실시간으로 포착했다.
연구진은 먼저 반복적인 단조로운 음향 사이에 불규칙한 소리를 섞어 들려주었다. 해마 신경원은 이 이상 음향을 정확히 구분해냈고, 시간이 지날수록 판별 능력이 개선됐다. 마취 상태에서도 신경 가소성과 일종의 학습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어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복합 실험으로 넘어갔다. 놀랍게도 해마 신경원은 이야기에 실시간 반응을 보였으며, 신경 발화 패턴을 통해 명사, 동사, 형용사 등 품사의 차이까지 구분해냈다.
LLM과 닮은 무의식의 '다음 단어 예측'
더 결정적인 순간은 그 뒤에 찾아왔다. 신경 신호가 문장 속에서 다음에 등장할 단어를 미리 내다보고 예측하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공동 저자인 벤자민 헤이든(Benjamin Hayden) 박사는 이러한 '예측 부호화(predictive coding)'가 원래 깨어 있는 상태에서 고도의 주의를 기울일 때 나타나는 기능으로 여겨졌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의식이 완전히 꺼진 상태에서도 챗GPT 같은 LLM이 다음 토큰을 생성하듯 똑같이 작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결과는 언어 이해와 단어 예측 같은 고차원 인지 기능에 반드시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의식이란 특정 뇌 영역의 단독 활동이라기보다, 뇌 전역의 훨씬 넓은 조율 메커니즘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한계도 명확하다. 제1 저자인 비기 카트로위츠(Vigi Katlowitz) 박사 연구팀은 이번 결과가 특정 마취제를 투여한 뇌전증 환자에게서 확인된 것인 만큼, 자연스러운 수면이나 병적 혼수 상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관측 영역이 해마 하나에 국한되었다는 점도 풀어야 할 숙제다.
왜 중요한가
이 연구가 지닌 가장 직접적인 가치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와 음성 보철 기기 분야에 있다.
뇌졸중이나 뇌 손상으로 말을 잃은 환자를 돕는 기존 기술은 대개 운동 피질 신호나 환자의 의식적 발화 시도에 의존해 왔다. 만약 해마의 자발적인 언어 처리 및 예측 신호를 해독할 수 있다면, 환자가 단어를 힘들게 떠올리기 전에 의도를 미리 보완해 주는 차세대 음성 보철 기기를 만들 길이 열린다.
AI 분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동안 LLM의 텍스트 생성을 두고 '단순한 확률적 다음 단어 맞추기일 뿐 진정한 지능이 아니다'라는 회의론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인간의 뇌 신경망 역시 무의식 깊은 곳에서 똑같은 예측 부호화를 기본 연산 원리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생물학적 지능과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이 생각보다 멀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뇌전증 수술이라는 특수한 임상 환경을 활용해 최첨단 전극을 인간 심부 뇌로 가져간 접근이 매우 영리했다고 본다. 비록 환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상용 기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의식의 불이 꺼져도 뇌의 언어 예측 엔진은 묵묵히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발견이다.
출처 (1)
- eurekalert.org(새 탭에서 열림)원문eurekalert.org